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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실장석 전편

실장석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생물'이다.

인터넷상의 극히 일부에서 화제가 되어 컨텐츠화 된 녹색의 이형 생물.
원조는 어느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모양이지만 거의 원형이 남지 않은 듯하다.
원형이 너무 안 남아서 지금은 한없이 오리지날적 존재에 가까워졌다.

다양한 설정이 덧붙여져 현재에 이르렀는데, 이런 것이 현실 세계에 있다면 틀림없이 자연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생활권이 침범당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즉, 그 정도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란 것이다.
그래서 컨텐츠로 다루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세상에는 별난 사람이 있기 마련.
그런 실장석을 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화해버린 것이다.

상품화라고 하지만 정말로 실장석을 만든 것은 아니다.
전자완구로서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실장석을 메인 화제로 삼는 사람들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하고서...

한때 있었던 이른바 '판권자가 명확하지 않은 인터넷 캐릭터의 판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어쩌고'하는 그것이다.
기코 같은 것은 이것을 면했지만 얼굴문자 캐릭터는 그대로 멋대로 사용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당연히 인터넷에서는 메이커에 대한 반발이 일었지만, 어느 시기부터 그 반발도 모습을 감추고 오히려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 '미도리치'라는 상품이 너무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왜 '실장고치'라는 이름이 아니냐고?
그것은 실장석과 비슷한 미도리치라는 오리지널 캐릭터라고 우기기 위해서다.
이런 부분을 절묘하게 피하는 점이 실로 기업답지 않은가.

뭐, 여러모로 절묘하다.
그래서 이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정식 명칭은 '미도리치'라는 이름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현실에 실장석이 있다면 틀림없이 학대파가 되었을 나도 어떠한 이유로 이것을 샀다.
구체적인 요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 상품은 순식간에 큰 화제가 되어 일반에 알려졌다.
나는 그 요인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흑백 액정의 싸구려 전자완구 하나에 8000엔...
심지어 내가 옥션에서 낙찰받은 후에도 시세가 계속 오르고 있다.
비싸다. 너무 비싸다!
이거 정가 2500엔(세금 별도)이라고!


'미도리치'는 세로 5cm, 가로 3cm, 두께 2.5cm 정도의 크기로, 긴 육각형 모양.
이는 '위석'의 형태를 간략하게 본뜬 것 같다.
색깔은 여러 종류 있는데 연녹색이 인기라고 한다.
레어 버전으로 금이 간 무늬가 탐포 인쇄된 물건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거의 도시전설이 되었다.

몸체 중앙에는 가로 세로 2cm의 흑백 액정 모니터가 있고 거친 도트 그림으로 표현된 실장석과 아이콘이 표시된다.
그 바로 위에는 액정 모니터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세로 5mm, 폭 2cm 정도 되는 직사각형으로, 시간 표시나 실장석의 대사가 표시되는 것이다.
아마도 메인 모니터에 문자까지 표시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더블 모니터 방식이 꽤 참신해서 싸구려 토이의 오명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모니터 아래에는 버튼 3개가 가로로 나란히 있다.
왼쪽부터 '선택', '취소', '결정' 버튼.
메인 모니터에 표시되는 아이콘을 '선택'으로 고르고, '결정'을 눌러 효과를 일으키는 원리.
그런데 그에 별도로 본체 오른쪽 옆... 육각형의 우변에 해당하는 위치에 완전히 독립한 수수께끼의 버튼이 있다.
어째선지 매뉴얼에 이 버튼에 대한 설명만 없다.
마치 그런 것 없다는 식으로 부자연스럽게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 바로 위, 우상단에는 적외선 통신용 포트가 설치되어있다.
이것을 사용해 다른 기종에서 키운 실장석을 서로 어울리게 하는 것이 가능한 것 같다.


본체에 달린 절연체를 빼서 전기를 통하게 하자 먼저 시간 설정 화면이 표시된다.
이것은 실장석의 생활 스케줄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시간을 입력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름 입력.
여섯 글자 이내로 이름을 결정. 단 가나 문자만.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가장 어려운 입력 작업은 여기까지.
전부 정하면 화면 중앙에 도트 그림으로 된 구더기실장이 표시된다.


...5mm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어서 표정이 안 보이지만...


구더기실장 밑에는 5개의 아이콘이 있다.
각각 왼쪽부터 순서대로 '만지기' '먹이' '가르치기' '혼내기' '흘리기'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흘리기' 옆에 '?'라는 아이콘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표시는 되지만 초반에는 쓸 수 없는 것 같다.

각각의 아이콘을 선택하면 선택 사항이 더 나오고 이것저것 쓸 수 있지만 그것은 후술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 아이콘을 다양하게 구사해서 실장석을 크게 키우는 컨셉이다.
...영락없이 다마고치다.


이름은 평범하게 '미도리'로 해봤다.
설정을 끝내고 표시된 구더기실장 미도리에게 '만지기'를 선택한다.
매뉴얼에 따르면 일단 이것을 해서 잠을 깨운다는 것 같다.

그랬더니...

"레후? 닝겐상 안녕한 레후ㅡ."

그렇게 서브 모니터에 표시되어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오, 나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대놓고 구더기실장을 만들어놓고 '구더기 미도리치'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 웃긴다.


"닝겐상, 프니프니해줬으면 하는 레후ㅡ♪"

♪ 마크를 날리며 미도리가 프니프니를 요구한다.
'만지기' 아이콘을 다시 고르자 이번에는 메인 모니터가 전환되고 큰 글자로 다른 선택지가 나왔다.

→프니프니
  쓰담쓰담
  부비부비


다시 '선택'으로 '프니프니'를 고르고 '결정'을 누른다.
그랬더니...

"프니프니〜♪ 기분 좋은 레후〜♪"

그런 대답이 돌아온다.
재미있어져서 다른 선택지를 골라봤다.
다음은 '쓰담쓰담'.

"닝겐상, 구더기쨩은 머리 쓰담쓰담 말고 배 프니프니가 좋은 레후ー."

오오, 불만을 제기했다!
그럼 '부비부비'는?

"레, 레후〜... 괴, 괴로운 레후〜."

어라, 왠지 괴로워하는 것 같다.
아, 프니프니가 아니고 손가락에 눌려서 부비부비 당하면 압박감에 괴로워하는 모양이군.
그럼 계속 프니프니하면 될까.
그래서 원하는 대로 '프니프니'를 연속으로 선택한다.

"프니프니〜♪ 기분 좋은 레후〜♪"

"프니프니〜♪ 기분 좋은 레후〜♪"

"프니프니〜♪ 천국 레후〜♪"

세 번 했을 때 옆에 운치 마크가 표시되었다.
오오, 마크가 점점 늘어난다!
물똥이 튀고 있다는 의미인가. 제법 공을 들였다.
그렇게 4회째...

"프니프니〜♪ 레, 레뺘〜♪ 레, 레, 레......"

"프츗"


어?

서브 모니터에 이상한 표시가 나오고 미도리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잘 보니 핏덩이 같은 도트 그림이 주변에 흩뿌려져 있다.
서, 설마... 너무 프니프니하면 죽는 건가?!
뭐가 이렇게 약해!


"한 번 더 합니까?"


천사의 고리 도트 그림과 함께 그런 메시지가 표시된다.
한 번 더...
물론 '네'를 선택한다.
이름은 다시 '미도리'다.
2대, 자 가라!


"프니프니〜♪ 기분 좋은 레후〜♪"


깨우고 나서 '프니프니'해주니 아까와 완전히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나중에 알았는데 구더기실장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면 금방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적당히 방치해서 프니프니 압사를 방지하고 인내력을 기르게 해야 하는 듯하다.
그, 그렇군...
인터넷에서 공략 사이트를 검색해보니 그런 정보를 발견했다.
7대 미도리, 이번에야말로 너를 제대로 키워주겠어.
4대부터 6대까지는 그만 일부러 프니프니를 마구 해버렸지만.


'먹이' 아이콘을 고르니 또 선택지가 나온다.

→우유
 실장푸드 C
 실장푸드 B
 실장푸드 A
 스시
 스테이크
 고기


공략 사이트에 따르면 처음에는 위쪽에 권장하는 선택지가 나오고 선택 화살표가 처음부터 이동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는 우유가 정답인가.
극단적인 스포일러는 재미를 해치니까 현시점에서 관련 있는 항목만 골라 확인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실장푸드 ABC라든지, 스테이크와 고기가 따로 있다든지, 의미불명이군.
일단 '우유'를 주니 화면에 우유병과 우유를 담은 접시로 보이는 그림이 나온다.


"맛있는 레후〜♪ 닝겐상 고마운 레후ー☆"


그렇게 제대로 인사하더니 미도리가 접시에 다가가 몸을 움직인다.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오, 또 메시지가 나왔다.
잘 먹었다는 인사인가?

"운치 냄새나는 레후. 닝겐상, 없애주는 레후"


...왠지 열 받는다.

운치는 '흘리기' 아이콘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 같다.
다시 선택지가 나온다.


 →운치
    구더기쨩


.........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화면 전체에 물이 흐르는 그림이 나온다.


"레뺘아~!"


음, 하드보일드하군.
아니, 나 뭐 하는 거야?!




    ※     ※     ※





2일째.

어제는 오로지 '만지기'와 '먹이', '흘리기'를 반복하기만 했지만 2일째로 오면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
다음은 '엄지실장'이다.
물론 정식 명칭은 따로 있다.
'엄지 미도리치'... 뭐야 이거.

역시 이 게임은 점막 제거 실패로 인한 성장 정지 같은 까다로운 개념이 없고,
단순히 구더기→엄지→자실장→성체실장이라는 4단계 과정을 밟을 뿐인 것 같다.


테치ㅡ테치ㅡ테치ㅡ

전자음이 울린다.
이것은 실장석이 이쪽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다.
물론 음소거도 가능하지만 익숙해질 때까지는 이대로 가자.

들여다보니 11대 미도리는 무사히 성장한 모양이다.
모니터 속에 아직 표정이 분간이 안 되는 조그마한 실장석 도트 그림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보다 이것이 실장석이라고 알아보기란 꽤 힘든데?!
7mm 정도밖에 안 되니까 말이지.
커지면 얼굴도 구별이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좋다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점점 표정이 보이게 되는 과정이 재미라고 한다.

"닝겐상, 배고픈 레츄. 밥 주세요 레츄."

그래서 바로 '먹이' 아이콘을 선택한다.
 

→실장푸드 C
  실장푸드 B
  실장푸드 A
  우유
  스시
  스테이크
  고기

어라, 어제는 우유가 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실장푸드 C에 커서가 있다.
이것이 추천이지?
시험해보자.

"레챳! 이거 맛없는 레츄. 더 맛있는 밥 원하는 레츄."

오오ㅡ 왔다.
이제야 실장석다운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군. 마음에 안 드는 먹이는 그에 맞는 반응을 하는구나.
그럼 B를 고르면 어떻게 될까?

"이건 맛있는 레츄. 닝겐상 앞으로도 부탁하는 레츄♪"

오오, 이번에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뭔가 찜찜한 대사지만 반응이 좋아 보이니까 당분간 B를 계속 줘보자.


테치ㅡ테치ㅡ테치ㅡ

또 금세 전자음이 울린다.

"닝겐상 놀아주는 레츄♪"

오오, 조그마한 것이 안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다.
제법 아기자기하게 움직이는군.
매뉴얼에 의하면 이 경우는 '가르치기' 아이콘을 선택, 그리고 '놀이'를 선택하면 되는 것 같다.


→놀이
  빨래
  목욕

'가르치기'라는 것은 아무래도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아이콘 같다.
오ㅡ 빨래나 목욕 같은 것도 있나.
하지만 지금은 '놀이'를 선택해본다.

화면에 둥근 구슬 같은 것이 표시되고 엄지 미도리가 그것에 달라붙어 있다.

"공 데굴데굴 즐거운 레츄~♪"

화면 양쪽을 오가며 노는 엄지 미도리.
꽤 귀엽지만 만약 여기서 다른 '가르치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우선 '빨래'다.

—아직 옷이 더럽지 않습니다—

주의 메시지가 표시되고 취소되었다.
음, 그럼 '목욕'은 어떠냐?

"목욕이란 것이 무엇인 레츄? 엄지쨩 목욕 알고 싶은 레츄."

야, 잠깐.
너, 원래는 '엄지 미도리치' 아니었어?
노리는 거냐!


→돕는다
  혼자 하게 한다.


두 개의 명령이 표시되었다.
아, 이렇게 가르치는 건가. 그렇군.
응석을 받아주면 좋지 않다. 지금은 처음부터 혼자 해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혼자 하게 한다'를 선택해본다.
화면에 목욕통 같은 그림이 스르륵 나와서 미도리의 그림과 겹쳐진다.
그런데...

"레뺘아아아! 빠, 빠지는 레츄~!"

"닝겐상 구해...꼬륵꼬륵."

그런 대사가 나온 다음, 잠깐 침묵이 지나가고 또다시 천사 마크와 '한 번 더'가 표시되었다.
아무래도 목욕통에 엄지실장을 그대로 집어넣은 취급이 된 것 같다.
커서가 추천하는 명령을 얌전히 고르라는 거냐?!

부들부들... 다시 시작이다!




    ※     ※     ※




3일째.

그 이후, 12대 미도리를 엄지까지 키우고 '목욕'을 가르쳤다.
엄지가 목욕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번 들어갔을 뿐인데 시도 때도 없이 조르게 되었다.

"목욕 하고 싶은 레치ㅡ!"

오늘은 이것으로 5번째 요청.
슬슬 '혼내기'를 시험할 때가 온 것 같다.
어리광을 부릴 경우는 이 아이콘을 쓰라고 한다.


→훈육
  금지
  재시도
  꽃


응? 왠지 잘 모르겠는 명령이 나왔다?
'훈육'은 안다. 아마도 어리광을 훈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금지'는?
'재시도'라는 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선택 취소와는 다른 것 같다.
게다가... '꽃'?

이것은 추천이 아닌 다른 것을 시험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갑자기 '금지'를 선택해본다.


"레챠아아아! 목욕 금지 싫어싫어 레츄! 닝겐상 용서해주는 레츄!"

그런 엄지의 대사가...
아, 이제 알겠다.
이것을 선택하면 실장석이 그때 했던 일이나 요구에 대해 '이제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게 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이 녀석은 목욕하는 것을 금지당한 셈이 되나.
흠... 그래도 불쌍하니까 '재시도'해주자.
방금 것은 어디까지나 실험이니까.

"...목욕 금지 싫어싫어 레츄. 닝겐상 용서해주는 레츄."

응? 어라?
아까와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있어?
잘 모르겠으니까 다시 한번 '재시도'를 선택해본다.


"...목욕 금지 싫어싫어 레츄. 닝겐상 용서해주는 레츄."


어ㅡ 잘 모르겠다.
한 번 더 선택해볼까?

"......목욕 금지는 싫은 레츄. 닝겐상 용서해주세요 레츄."

어라? 대사가 미묘하게 변했어?
영문을 몰라서 잠시 생각에 잠겼더니 왠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재시도'란 것은 혹시 방금 했던 행동을 다시 한번 하게 해서 교정해나가는 것일까?
그래서 이번에는 말투를 고친 것인가.
호오, 꽤 디테일하군.

그럼 '꽃'은 뭐지?

'지금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기계의 경고 메시지가 나온다.
음, 무슨 뜻이지?
쓸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으로 가자.


순순히 '훈육'을 선택했지만 아무래도 이미 '재시도'라는 다른 행동을 취해버려서 훈육할 의미가 없어진 모양이다.
화면 속의 미도리는 작은 머리를 갸웃하며 ? 마크를 띄우고 있다.
매뉴얼에 의하면 이것은 이쪽의 요구를 실장석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과연, 그렇다면 뭔가 문제를 일으킨 직후에 사용해야 하는 명령이란 건가.


하지만 미도리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목욕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먼저 선택한 '금지'의 효과인 것 같다.
내가 목욕을 시키려 해도 미도리가 거절하게 되었다.
시험 삼아 이 타이밍에 '혼내기'→'훈육'을 해봤지만 또 고개를 갸웃하며 ? 그림만 나온다.

...나, 왠지 하면 안 되는 선택을 해버린 건가?





    ※     ※     ※




4일째.

엄지실장이 되니 조금씩 식사를 요구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호출당할 때마다 계속 '먹이'→'실장푸드 B'를 선택했더니 오늘 5회째에 대사가 변했다.

"더 맛있는 밥은 없는 레치? 닝겐상, 와타치 생각도 좀 해주는 레치!"

그러면서 분노 마크(소위 힘줄 마크라고 하는 것)를 날리고 있다.
...어라, 이상하네.
확실히 B는 좋아했을 텐데?
시험 삼아 이번에는 C를 선택해봤다.

"웃기지 마는 레치! 더 맛있는 밥이라고 한 레치! 하여간 멍청한 닝겐상 레치!"

울컥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혼내기'를 선택해버렸지만 비로소 이 B와 C의 원리를 깨달았다.
아마도 이 ABC 등급은 실장 푸드의 맛과 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C는 맛이 없고 B는 조금 낫고 A는 맛있다는 느낌일지도.
그래서 이 미도리는 B를 너무 주는 바람에 익숙해져서 더 좋은 먹이를 요구하게 되어 태도가 건방져진 것인가.
나는 이 시스템의 높은 완성도에 더욱 흥미가 생긴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떻게 할까.
 

  훈육
→금지
  재시도
  꽃

여기서 금지를 선택하면 또 싫어할까?
시험 삼아 선택해보니...

"이런 맛없는 거 이제 필요 없으니까 후련한 레치."

그런 시원스러운 대답.
우와, '금지'가 꼭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경우는 식사가 아닌 '먹은 것'이 금지 대상이 되는 건가.
음, 이건 안 좋았다.


테치ㅡ테치ㅡ테치ㅡ
"얼른 맛있는 것을 내놓는 레치!"

'혼내기→'훈육'을 선택해보니 화면에 파리채 같은 것이 나와서 미도리를 때렸다.

테치ㅡ테치ㅡ
"아픈 레치! 뭐 하는 레치!"

오오ㅡ 반응하고 있어.
다시 한번 같은 것을 해보자.

테치ㅡ테치ㅡ
"레챠ㅡ앗! 아픈 레치! 이제 용서해주는 레치!"

다시 한 세트 더!

테치ㅡ테치ㅡ
"레챠ㅡ앗! 레치ㅡ잇!"

재밌다!
학대 요소도 제대로 있잖아!
그렇지. 이건 당연히 팔리지!

아자, 이것으로 끝!

"치벳!"

어라,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천사 마크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화면이 멈춘 것 같지만 아이콘은 멀쩡히 선택할 수 있다.
뭐지? 매뉴얼을 보자.


'훈육이 너무 강하거나 여러 차례 고통을 받으면 미도리치가 가사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법인데, 그런 거였나.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여기서는 '만지기'→'머리 쓰다듬기'를 몇 번 선택하면 빨리 회복한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시험해보니 확실히 금방 부활했다.
가사 상태까지 프로그램되어있다니 이 시스템 만든 사람, 실장석에 대해 정말 잘 아네.


테치ㅡ테치ㅡ테치ㅡ
"닝겐상 놀아주는 레치ㅡ♪"

조금 전까지의 가혹한 체험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행복회로까지 탑재냐!

아,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엄지의 그림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뿌릿♪
운치 마크 출현!

오ㅡ 화장실인가.
아니 잠깐만?
다마고치의 경우는 운치를 싸도 상관없었지만 실장석의 경우엔 그러면 안 되지.

"운치 나온 레치ㅡ♪ 기분 좋은 레치ㅡ. 제대로 운치 누는 와타치는 천재 레치ㅡ☆"

'흘리기'를 선택하려다가 문득 어떤 것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실장석 관련 각 보관고에 올라와 있는 실장 스크를 읽어보면 실장석에게 화장실 개념을 훈육하는 내용이 꽤 있었다.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나의 예상대로 실장석 매니아라면 이런 곳을 빼먹을 리가 없다.
분명 어딘가에 화장실 훈육이 있을 것이다.
시험 삼아 '혼내기'→'훈육'을 선택해본다.

그러자 화면 가장자리에 변기 그림이 나왔다.
그리고 엄지 옆에 동그란 무언가가 나왔다.
미도리가 그 그림을 손으로 잡는다.

"콘페이토 레치ㅡ♪"

콘페이토?
'훈육'인데 왜 콘페이토?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미도리는 그 콘페이토 같은 그림을 삼켜버렸다.

잠시 후...


"레, 레레레! 운치 나오는 레치! 이제 못 참는 레치!"

그러면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잊지 않고 비명을 나타내는 테치ㅡ테치ㅡ 하는 전자음도 연동해서 울린다.
그렇군. 그것은 콘페이토가 아니라 '도돈파'인가.
역시 이것을 만든 사람은 뭘 좀 아는 사람이다.

일단 그대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운치 마크가 화면 가득 표시되고 미도리의 모습이 그 속으로 사라졌다!
테치ㅡ테치ㅡ테치ㅡ 하고 전자음이 울린다.
아까보다 소리의 간격이 짧아서 어쩐지 긴급경보처럼 들린다.

"운치... 괴로운... 레치...."

그런 단말마 대사와 함께 또다시 나온 천사 마크.
그리고 '한 번 더' 표시.
미도리는 또 죽어버렸다.

이게 뭐야.
뭐냐고 이 전개?!
여기까지 와서 또 키워야 하냐고!!


'훈육'을 선택했는데 엄지가 죽어버린 것이 납득이 되지 않은 나는 공략 사이트에서 이런 전개가 된 이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원래 여기선 자력으로 규명해야 하겠지만 사정이 있어서 그런 느긋한 짓은 할 수 없다.
공략 게시판을 보니 나와 같은 곳에서 막힌 사람이 많았다.
똑같은 질문이 여러 번 반복되고 그때마다 누군가가 '공지 좀 봐라'를 외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게시판의 첫 부분을 보니...


Q: 화장실 훈육에서 실장석이 반드시 죽는 것은 버그인가요?

A: 이는 초보자가 처음 부딪히는 벽이며 버그가 아닙니다.
    도돈파를 먹은 직후 다시 한번 '혼내기'→'훈육'을 해서 변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선택할 시간이 얼마 안 되어서 틀리면 도돈파로 나온 운치에 파묻혀서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화장실 훈육의 달성도는 숨은 파라미터 '영리함'에 따라 바뀝니다.
    화장실을 한 번에 기억한 자는 양충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잘 길러주세요.


그렇게 적혀있었다.
과연, '훈육' 콤보를 조합해야 하는 건가. 이해했다.
하여간 쓸데없는 부분에서 매번 막힌다.
이거 실장석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클리어 못 하지 않나?

그나저나 숨은 파라미터라는 것은 처음 본다.
이게 뭐지?
매뉴얼에 아무런 설명도 없으니 정말로 숨겨진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RPG나 육성 시뮬레이션처럼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는 건가?
나는 공략 사이트의 '파라미터에 대하여'라는 항목을 선택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제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없기를.


■파라미터:

'미도리치'에서 키우는 실장석은 숨은 파라미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과 교육, 훈육에 크게 관련된 중요한 것이지만 플레이어는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 적외선 통신 포트를 경유하여 실장석의 데이터를 컴퓨터로 보내 참고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니지아키 씨가 제작하신 프리웨어 '실장해부'를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숨은 파라미터는 '강함', '영리함', '착함', '분충', '운'의 5항목으로 나뉘어있고 스타트할 때나 '한 번 더'할 때 수치가 랜덤으로 분배됩니다.
1~255의 수치의 크고 작음으로 실장석의 지능이나 사랑스러움이 크게 변합니다.
그러나 모든 수치를 255로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전부 1로 해도 안 됩니다.
어디를 어떤 수치로 하면 좋은지에 관한 연구가 곳곳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 아래에 있는 니지아키 씨의 사이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파라미터를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을 듯합니다.
또한 이 파라미터는 태어난 아이에게도 인계되지만, 랜덤으로 어느 항목의 수치가 극단적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갑니다.
'분충'이 255로 태어났을 경우는 굉장해지는 것 같으니까(웃음), 솎아내기를 하실 분은 부디 조심하세요.


>니시아키 씨의 사이트 '실장해부'
               



뭐야, 이 불필요할 정도의 열정?!
게다가 아이도 만들 수 있는 건가!
대단하다. 이거 다마고치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고.
개발한 녀석 진짜 천재 아닌가!

일단 대강의 개요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읽어나갔더니 본체 설정 시간을 일부러 늦춰서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비법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좋았어, 시간은 되도록 단축하고 싶으니까 13대 미도리는 이 방법으로 즉시 엄지로 가자.



그 후 13대 미도리는 순조롭게 자라 8일째가 지날 무렵에는 '자실장'으로 성장했다.

"테치테치ㅡ♪ 닝겐상 좋아하는 테치ㅡ!"

이번 미도리는 아무래도 '착함'과 '영리함'이 높고 '분충'이 낮은 것 같다.
'실장푸드 C'도 잘 먹고 무엇보다 어리광이 없어서 수고가 들지 않는다.
정말로 좋은 자이지만 나는 점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아직도 본체 옆의 스위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플레이 중에 사용이 요구되는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뭘까... 일단 눌러볼까?
이제야 얼굴이 분간될 정도로 커진 미도리가 화면 안에서 즐겁게 공놀이를 하고 있다.
그 도중에 옆의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테치?"

갑자기 미도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미도리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지? 울고 있음을 나타내는 눈물 아이콘이 위에 표시되었다.

"닝겐상, 와타치 착한 자로 있는 테치! 아무 잘못도 안 한 테치!"

어? 무슨 소리야 이 녀석?
그렇게 생각하고 화면을 잘 보니 지금까지 공백이던 아이콘의 오른쪽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아이콘이 출현했다.


'학대'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건가.
뭔가 잘 모르지만 마음속 깊이 납득하는 나.
즉시 그 아이콘을 선택해봤다.
당연하지!


딱밤
꺾는다
찢는다
벤다
찌른다
독라
빼낸다


스크롤까지 뜨며 갑자기 7개나 되는 명령이 나왔다!
심지어 추천 화살표도 없다♪
이것은 즐거울 것 같다.
나는 즉시 '빼낸다'를 선택했다.
수술에 쓰는 메스 같은 그림이 나와서 미도리의 그림에 겹쳐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놀고 있던 미도리는 꼼꼼하게 사지가 고정된 구속 상태로 바뀌었다.

"아파아파, 그만하는 테치. 그만하는 테치!"

"테갸아---앗!!"


→절인다
 부순다
 먹인다


...틀렸어. 이 게임 다른 의미로 끝났어!
나는 다음 날 또 다른 미도리치 한 대를 구해오기로 다짐했다.
이렇게 즐거운 것을 한 개만 가지고 참을 수 있겠냐!

그나저나 명불허전이다.
이거야 당연히 팔리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확신했다.




-계속

댓글 1개:

  1. 와 이거 진짜로 안나오냐 존나갖고싶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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