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이 있는 풍경 4 실장구슬

아들이 이과 수업때 받은 실장 구슬 키트를 갖고 왔다.
어린이들의 환경의식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한가했기 때문에 아들과 같이 살펴보았다.
아들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실장홍도 함께다.

실장 구슬 키트의 삽화에는, 투명 캡슐에 엄지 실장과 구더기 실장이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행복한 자매의 그림이지만, 현실의 지옥도가 쉽게 상상이 되어 한숨을 쉬고 싶어진다.

온천 여행을 갔던 관광지에서 본 간판의, 냄비 요리 안에서 웃고 있는 게나 소 그림이 어쩐지 떠올랐다.


어린이용 교재 키트인 실장 구슬은 친절하게 정중한 설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가챠폰의 구슬처럼 적도면에서 두개로 조합되는 투명 아크릴로 된 반구 한쌍.
비닐 봉지 1장.
반구의 저부에 덮어 씌울 수 있는 화분 밑바닥의 넷과 같은 둥근 그물.
토양의 분해자인 진드기의 일종의 알이 들어 있는 피트 모스.
토양 세균과 균류의 포자가 조정된 흙.
광합성하는 조류와 균류의 공생체인 지의류가 붙은 자갈.
그리고 팩에 들어간 엄지 실장과 구더기 실장 세트이다.


아랫 면이 편평해서 구르지 않게 되어 있는 아래 반구에 흙과 피트 모스를 넣는다.
규정량의 물을 뿌려서 흙을 불린다.
화분 밑바닥 넷과 같은 둥근 그물을 끼워 넣는다. 흙이 붇고 있으므로, 그물에서 흙이 조금 밀려 나온다.
지의류가 붙은 돌멩이를 그물에 꽂는다. 그물코에 잘 끼울 수 있도록 돌기가 붙어 있다.
흙이 건조하지 않도록 비닐 봉투에 넣는다.
이 상태에서 반나절 그늘에 두어서 지의류와 토양 세균을 안정시키고, 진드기의 알을 부화시킨다.

이 키트에서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다.


이 다음에는 실장홍이 사용할 간이 화장실을 밭 옆에 만들어 주었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제대로 울타리를 쳐달라고 해서 귀찮다.
실장 생물의 수치심 같은 것은 관심없지만 발효된 차 찌꺼기인 실장홍의 배설물은 양질의 부엽토가 된다.
우리 부지의 찻잎을 따는 대가로 징집하기로 했다.
앞으로 여름철에 걸쳐 작물의 뿌리 주위에 벼짚과 함께 씌우는데 정말 상태가 좋다.



일주일 뒤, 팩을 잘라서 가사 상태의 엄지 실장과 구더기 실장을 캡슐에 넣는다.
그리고 투명 아크릴 위 반구를 아래 반구에 조합시킨다. 정확히 그레이프 후르츠 정도의 크기이다,
나사식으로 비틀면 찰칵 소리가 나며 빠지지 않게 되었다.
5분 정도 지나자 가사 상태이던 엄지 실장과 구더기 실장이 눈을 뜬다.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이윽고 캡슐 밖의 인간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흔들거나 꼬리를 흔들거나 캡슐 벽을 찰싹찰싹 두들기거나 몸을 뒤집고 콧김을 거칠게 내뿜거나 하기 시작했다.

"레훈~ 프니프니프뇨후~"
(닌겐씨 만나서 반가운 레후. 우지챠 프니프니 해주면 기쁜 레후~ )

"렛츄~웅~ 레챠레치 렛치~잉"
(닌겐씨 안녕한 레츙~ 앞으로 도움이 되도록 힘내는 레치~)


아들과 함께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고, 실장홍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도 별로 흥미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다음 주에 있을 과학 수업에서 실장 구슬을 제출해야 하므로, 방해가 되더라도 일단 놓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해 장수풍뎅이를 길렀던 플라스틱 수조에 넣고 직사 광선이 없는 뒤뜰에 놓아두기로 했다.

"레훙 레훙 레후후"
(어째서 프니프니 해주지 않는 레후? 왜 레후? 우지챠 아주 슬픈 레후~)

"레에에엥 레에에에에엥 레에에... 레챠아아~~~!!!!!"
(레에에에엥 두고 가지 마는 레치~ 너무하는 레치... 아타치들 버림 당한 레챠아!)




인간이란 관심 없는 것은 금방 잊어 버리기 때문에, 실장 구슬은 그 후 일주일간 방치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과 수업을 잊지 않은 듯, 아들은 실장 구슬을 편의점 봉투에 넣어서 학교에 가져갔다.

"우지챠 데굴데굴 하는 레후웃~ 오네챠 도와주는 레훗!"
"흔들리는 레칫. 무서운 레칫. 위험한 레칫! 우지챠 어디 레치? 우지챠아아아!"



어째서인지 다시 갖고 오지 않았다. 그것은 견본으로 교실에 놓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일주일동안 우리 실장 구슬 외에는 전멸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인간이 먹이를 주길 기대하며, 생명줄인 지의류를 곧바로 다 먹어 치우고 아사.
맨먼저 구더기 실장을 먹어치운 엄지 실장이 자실장으로 성장하여 캡슐 내에서 압사.
직사 광선을 그대로 맞는 양지에 두는 바람에 가열되서 사망.
불쌍하다고 처음에 실장 푸드를 많이 넣어 주는 바람에 똥이 넘쳐서 익사.
목욕탕에 띄워두어서 적온에서 지나치게 증식된 균류의 포자가 폐에 막혀서 질식사.
일부러 음식 프로그램을 계속 보여줘서 스트레스로 사망.
실장 구슬을 애완용 고양이가 갖고 놀아서 스트레스사.
등등...


우리 실장 구슬은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바람에 오히려 잘 되었다. 우리들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무시하고, 동시에 완전히 방치했으므로, 버림받은 것들끼리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만을 궁리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부 먹어치우지 않고, 한계가 있는 지의류는 조금씩만 갉아먹고, 곰팡이를 주식으로 하여 자신들의 똥을 빨아 먹고, 때때로 지면에서 기어 나오는 진드기를 맛있는 음식으로 삼아 잘 살아 남았다.

아들의 실장 구슬은 사육의 모범 예로서 교실에 놓아두게 된 것 같다.

"닌겐씨가 가득한 레후~ 프니프니 마음껏 받는 레후~ 우지챠 행복해지는 레후"

"보고있는 레치. 닌겐씨가 아타치들을 보는 있는 레치. 분명 상냥한 주인님이 선택해주는 레치"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일체 기대하지 않고, 일체 간섭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 어차피 곧 저놈들도 자멸할 것이다. 닫혀있는 낙원 따위, 사소한 악(惡)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하물며 실장석이라면 더욱.


"우지챠 이제 이런 프니프니로는 만족할 수 없는 레후. 닌겐씨의 푸니프니가 좋은 레훈"

"이런 세계는 이야 레칫. 똥구더기년도 끝인 레치. 아타치는 반드시 행복해지는 레칫"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일단 이과의 평가 점수가 된다고 하니까 아들은 기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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