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올해도 연말이 다가왔다. 평소 보통 속도로 걸을 수 있는 시장거리도 새해준비를 하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한다. 무거운 떡팩과 야채를 들고 어찌어찌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갑자기 사람이 없는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의 가운데에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고통 받는 실장석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라고 적힌 간판이 있다. 간판 앞에선 청년들이 소리 치며 사람들에게 권유를 하고 있다.  

"겨울추위, 학대파, 무책임한 사육주 때문에 공원 실장석들은 생명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의를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 차가운 겨울에 고통받는 실장석들에게 여러분의 지원과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청년들 앞에는 바구니가 놓여있고, 그 안에는 잔돈이나 야채 등이 담겨 있다. 내 눈앞에서 한 노인이 거기다 동전을 넣고 있다.

엮이고 싶지 않아서, 일단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아무래도 저런 계열의 단체는 별로다.

왜냐고? 사람들도 각자 여러가지 사정들이 있을 것인데,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선의가 없다고 단정하는 듯한 말투나, 뚜렷히 우월감이 실린 눈길을 남들에게 던지는게....도대체 뭘 하는 건가?

... 따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보니, 공원에서 들실장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 최근 이 근처에서는 들실장의 투분과 먹이사냥 때문에 피해가 잇따르고 있는데도 먹이를 뿌리는 바보가 끊이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아파트의 3층에 살고 있어서 직접 피해를 본일은 없지만 소문만은 자주 듣는다. 예전엔 동장이 주의를 줬으나 말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기세로 반항한 모양이다. 겨우 실장석을 상대로 그렇게 진지해 질수 있다니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제대로 코트를 껴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은 사정없이 노출된 피부를 도려낸다.... 남의 일 따위 신경 껐어.... 내 보폭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빨리 집에 가서 코타츠에 기어들어 가고 싶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따뜻해지고 싶다.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손에 파고 드는 비닐 봉투와 추위를 참고 있는 나에게 실장석 한마리가 다가왔다. 목줄을 보니 들실장은 아닌 것 같다. 목줄에 탑재되어 있는 링갈의 스피커에서 기계음성이 흘렀다.




"인간씨, 부디 잠시만 집에 들여 주는 데스. 주인님이 나를 남긴 채 귀성해 버린 데스…"

서투르게 대화하다간 내년까지 우리집에 들러붙으려 할 것 같아서 못 들은 척 했다. 각층을 다 서면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작은 벨소리와 링갈의 목소리만 바닥에 울린다.

노숙하면 거의 확실히 죽을 걸 아는 실장석은 아주 애절하게 내게 호소하고 있다. 기본 훈육은 된 듯 손을 대거나 하진 않았지만, 옆에서 데스-데스- 떠드는 건 솔직히 성가시다. 내가 실장석을 흘깃 보고, 턱으로 출구를 가리키며 나가라는 몸짓을 하려 할 때,

"잠깐만, 당신-"

하고 누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거기엔 윗층의 불평꾼 아줌마가.....실장석보다 더 귀찮은 거에 걸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봤는데, 그렇게 부탁을 하는데 무시하다니 너무 하지 않아요? 좀 더 그럴듯한 대응을 하지. 불쌍하지 않아?"

...이 아주머니는 전형적인 "남불내로" 정신으로 유명하지. 본인은 정론이랍시고 말하는 걸텐데... 그럼 말꺼낸 분부터 해야지. 트집잡기 외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듣는 건 시간 낭비라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실거면, 댁이 저 실장석을 거둬 주면 되겠네요?"

하고 내뱉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까지 그 아줌마는 뭔가 말하는 듯 했지만,
아무래도 좋다. 제발 나를 엮어넣지만 마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에 있는 현관문을 여니 어디에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방에는 금붕어와 나만 살고 있는데 웬 목소리?

이리저리 살피며 목소리가 나는 쪽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유리문 너머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듯. 살짝 베란다에 나가보니 어느새 실외기와 벽의 틈새에 5마리의 실장등이 둥지를 틀고 있다.

평소에는 귀찮은 놈들을 만나기 싫어서 최대한 외출을 삼가고 있었더니, 마침내 저쪽에서 나를 찾아왔군.

...내 평온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되지?


-끝


댓글 7개:

  1. 아파트3층의 베란다에 올라오다니 무서운 실장석인데스 저 닝겐 처맞을지도 모르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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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데프픗 실장등과 실장석도 구분못하는 닌겐이 있는데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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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데에..? 실장등이면 랜턴아닌데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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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오마에... 우지짱급 지능인 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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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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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 평온을 새로운 즐길거리에서 찾아보시는게 어떠신지? 때마침 재료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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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테..재밌게 읽고있었는데 벌써 끝인테스?후속편을 원하는테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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