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판지

심야에 산책을 하던 도중, 골판지 상자를 발견했다.
길에서 벗어난 나무뿌리 근처, 가로등도 닿지 않는 곳에, 조립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골판지를 발끝으로 눌러 보았다.
조심스럽게 가볍게 한 번, 다음은 강하게.
상자는 비어있어서, 약간 기울어지더니 지면을 미끄러져 마른 소리를 냈다.

어쩐지 맥이 빠져서 나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뭔가 강한 냄새가 난다.
나는 상자를 안고, 집으로 가져가 보기로 했다.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보니, 상자는 상당히 낡아있었다.
습기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 탓인지, 소재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지워지기 시작하는 상자에 인쇄된 글씨에 따르면, 원래는 귤 상자였던 모양이다.
상자를 어루만지자, 손가락이 까매져 버렸다.
조금은 설레 하면서, 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이중으로 내용물을 숨기는 판을 바깥쪽으로 접자, 녹색 얼룩이 눈에 뜨였다.
실장석 특유의 녹색 배설물 색.
역시 이 상자는 실장석의 거처였던 것 같다.
상자의 모서리 중 하나에 전단지가 깔려 있었다.
떼어내려고 손톱을 세우자, 뻬릿 하고 마른 소리가 났다.
조금 벗겨 봤더니, 전단지는 여러 장 겹쳐져 있었다.
게다가 「깐다」라기보다는 「넣는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영화에서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두꺼운 종이로 벽의 그림을 그리고,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기대 세워 두는 장면을 본 적 있다.

전단지는 그 두꺼운 종이를 두는 방법과 비슷했다.
밖에서 그 모서리를 보면, 새까매져 있지만 배설물 얼룩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태어난 자실장의 화장실에 사용했지만, 똥이 스며들어서 구멍이 뚫릴 것 같았기 때문에 보강을 했을 것이다.

친실장이 부지런히 전단지를 접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다른 눈에 띄는 것은 하나의 선처럼 된 얼룩이다.
이 쪽 저쪽, 좁은 상자 속을 배회하고 있다.
상자 속을 헤매고 다니는 구더기 실장의 광경이 눈에 떠오른다.
선이 한 개 뿐인 것이 구더기 실장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자실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상자 안에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데스크탑이 들어 있던 박스가 있을 것이다.
그거라면 나도 들어갈 수 있을 거다.
벽장에서 꺼내 와서 조립해 보았다.
한쪽씩 발을 집어넣고 안에 웅크리면 빠듯하게 머리까지 들어갔다.
이중의 뚜껑을 닫으면 상자 안은 어두워진다.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반향하고, 움푹움푹 소리가 난다.
상자 안은 꼼짝도 할 수 없어 괴롭고, 머리를 움직여도 무릎과 다리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밖이 보고 싶어 싶어서, 어떻게든 정좌하고 손잡이 부분을 접어서 엿보기 구멍을 만든다.
구멍에서 책상이 보였다.
책상에 뭔가 놓여 있지만,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인지, 여러 가지 궁리하고 확인하려고 했지만, 상자 속에서는 허사였다.
다시 무릎을 안고 앉아서 눈을 감고, 상자 속의 실장석을 상상해 보았다.
친실장의 하루 전리품을 먹은 뒤 한때의 단란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쳐서 벽에 기대는 친실장, 구더기 실장은 어슬렁어슬렁, 좁은 상자 속을 뛰어다니는 엄지 실장,
친실장에게 상대해달라고 조르는 자실장.
공상을 적당히 그만 일어두고 일어서자, 상자 안과 실내 공기가 전혀 달랐다.
상자 안에 있을 때 공기가 들어갔을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실장석 둥지를 보았다.
그러자 투시창 밑이 번들번들한 것을 발견했다.
밖을 엿보는 친실장의 입김이 닿은 흔적 일 것이다.
그 흔적의 아래에 세로로 길게 번들번들 한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실장이 친실장을 흉내내서 밖을 엿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만 자실장의 입김 흔적은 친실장과 같은 높이에는 닿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발사 폭발 직전에 일순간 사라지는 여름 불꽃놀이를 나에게 연상시켰다.

상자의 주인은 어떻게 됐을까.
상자 안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어딘가로 이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를 기르는 것이 끝나서 상자가 필요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성체 한 마리라면 상자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집이 없는 쪽이 홀가분하고, 담의 틈이나 식목의 뒤로도 충분할 것이다.
상자는 따돌림 당해서 죽고 말았다.
다음날 상자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다.
바닥의 틈새에 똥이 끼어 있었는지, 마른 똥 찌꺼기가 방에 흩어지고 말았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쓰레기장에 상자를 가지고 간다.
쓰레기장에 상자를 놓고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데스―"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성체 실장석 한 마리가 내가 버린 골판지를 갖고 있었다.
옷의 오염상태를 통해, 들실장 중에서 갓 성체가 된 실장석으로 추정되었다.
실장석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길래 살짝 고개를 끄덕였더니, 실장석은 상자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떠나 갔다.

--------------------------------------------끝


별 상상을 다 하네.

댓글 2개:

  1. 그래도 저게 프로 실생인 증거 아닌데스우?

    답글삭제
  2. 분위기가 이상이 쓴 시같네

    답글삭제